| [칼럼] 영웅들의 초상화 유감(遺憾) 정기연 기자 jky5320@hanmail.net |
| 2026년 10월 06일(화) 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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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중세 유럽의 예수화는 백인 남성의 용모를 띠고 있고, 동양으로 건너온 예수의 얼굴은 동양적인 이목구비를 갖추기도 한다. 한민족의 시조라 불리는 단군의 영정 역시 시대와 화가에 따라 신선의 모습에서 위엄 있는 군주의 형상까지 제각각으로 변해왔다. 역사적 사실(Fact)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이 초상화들은 커다란 ‘허구’이자 ‘픽션’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를 둘러싼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단순한 허구를 넘어서는 깊은 상징과 복잡한 감정의 결이 존재한다.
먼저, 이 초상화를 깊이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정은 결코 한 장의 그림이나 종이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와 나를 연결해 주는 보이지 않는 ‘고리’이자, 마음을 편히 기댈 수 있는 구체적인 ‘매개체’다. 인간의 심리는 형상이 없는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접할 때 훨씬 더 깊은 안도감과 경외심을 느낀다.
따라서 이들에게 영정 속 얼굴의 진위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초상화는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닿는 유일한 주소지이자, 고단한 삶의 무게를 위로받는 성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한 화가의 상상력에서 출발한 붓질이었다 할지라도, 수백 년 동안 그 위에 쌓인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간절한 정성이 그 그림에 진짜 ‘영성’과 ‘권위’를 부여한 셈이다.
반면,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거나 신앙적·감정적 유대가 없는 이들이 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하고 씁쓸하다. 이들에게 초상화는 ‘만들어진 신화’의 단면에 불과하다. 화가의 주관적인 상상력에 불과한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거나, 그 형상 자체에 절대적인 거룩함을 부여하는 모습을 볼 때 이들은 낯선 이질감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다.
“실제 본 적도 없고, 증명된 적도 없는 얼굴에 어떻게 저토록 깊은 영혼과 신념을 맡길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때로 우상숭배에 대한 경계심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상징이 본질을 압도해 버린 현실에 대한 ‘유감(遺憾)’으로 남기도 한다. 허상을 진실로 믿는 대중의 심리에 대한 답답함이 마음에 자리 잡는 것이다.
결국 영웅과 성현들의 초상화를 둘러싼 간극은 ‘사실인가, 마음인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역사적 사실과 이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초상화는 명백한 허구의 산물이지만, 마음의 위안과 구원을 찾는 이들에게 초상화는 진실한 마음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눈앞의 그림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두고 서로의 신념을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일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화가가 그려낸 눈앞의 ‘물질적 형상’이 아니라, 그 인물이 인류에게 남긴 사랑, 희생, 평화, 그리고 홍익인간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우리 가슴속에 품고 있느냐이다.
겉껍데기에 불과한 초상화의 형상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비판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그 이미지 너머에 담긴 고귀한 뜻을 되새길 때 비로소 우리는 초상화가 지닌 유감스러운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정기연 기자 jky5320@hanmail.net
